동네1 | 서촌마을의 동네서점 여행지도

동네1 | 서촌마을의 동네서점 여행지도
책방으로 떠나는 도시 속 착한 여행, 「여행자의 동네서점」
여행자의 시선으로 동네서점이라는 작은 점과 점을 6개의 선으로 엮어 서울의 동네서점 여행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서점은 도시 여행자의 팍팍한 삶에 휴식과 영감을 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후원금은 「여행자의 동네서점」 책자와 지도 제작에 쓰입니다.
이 6개의 선은 책·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6일간의 여행 코스로서뿐 아니라, 데이트 코스와 휴일 산책길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여행자의 동네서점」 지도와 책자를 들고 책방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에서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서촌은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와 천재 작가 이상 등이 서촌 주민이었다. 현재도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 숍이 많은 곳으로 오랜 시간만큼이나 예술적 정취가 깊이 남아있는 동네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물길을 따라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청계천 북쪽에 자리했다 하여 북촌이라 불러졌다. 북촌은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 800여 채가 남아 사진 찍기 좋은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전통과 현대가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역사의 시간만큼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촌이 더 흥미로웠다. 나는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여행지 서촌을 시작으로, 동네서점 여행을 시작했다.
시간의 겹이 쌓인 곳, 서촌의 동네서점 지도 ⓒFunnyplan
더북소사이어티 The Book Society
광화문과 영추문을 지나
벚꽃이 피기 시작한 봄날,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서촌으로 출발했다.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더 가깝지만 따뜻한 날씨라 광화문역에서 내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위엄을 마주한 후, 백성을 먼저 위한다는 민본사상으로 지어진 경복궁에 다다랐다. 광화문 앞에는 움직임 없이 무표정한 수문장과 사진을 찍어보려 포즈를 취하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활짝 열린 광화문 사이로 바깥 세상과 궁궐을 나누는 흥례문과 백성을 위해 근면하게 정진해야 한다는 근정문이 겹치듯 보였다.
<더 북 소사이어티> 가는 길, 보안여관 <더 북 소사이어티> 가는 길의 동네 상점들
광화문을 마주하고 왼쪽 담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입을 콱 다문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이 나타난다. 영추문이 있는 경복궁 길 건너 동네가 통의동, 바로 서촌이다.
서촌은 한껏 주인장의 아기자기함을 뽐낸 작은 카페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글자도 희미해진 간판을 단 상점이 나란한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트렌디 한 현대미술 전시를 주로 여는 대림미술관과 여관을 리모델링하여 실험적인 다원예술을 선보이는 보안여관을 들리러 찾는 동네지만 오늘만큼은 여행의 목적이 달랐다.
일단, 영추문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통의동 우체국과 정부청사 서울 별관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 팔레 드 갤러리를 지나면 왼편에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그 흔한 돌출 간판 하나 없는 첫 번째 여행지, 2010년 설립된 서점 <더 북 소사이어티>에 도착했다.
<더 북 소사이어티> 입구에 놓인 입간판
초록 문 속, 책의 세계
총총. 좁은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다다르니 무료 배포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홍보물들과 포스터가 제일 먼저 여행객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단단하지만 생동감 있는 초록색 철문이 반기고 있었다. 아니 문이 굳게 닫혀있었으니 반기고 있다 할 순 없으려나. 매주 월요일이 휴무이고 오늘은 수요일인데 설마 휴가라도 간 것일까.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았다. ‘평일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운영’.
시계를 보니 12시 40분.
‘뭐 금방 오겠지, 조금만 기다리자.’
무료 홍보물을 아주 천천히 전부 훑고, 초록 문 중앙에 손바닥만 한 작은 유리창으로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 저 유리창 너머 세계로 나를 들여보내줄 매니저가 나타났다.
손님이세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두 손 가득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양이었다.
서점은 어수선한 듯 그들만의 질서로 정리되어 있었다. 차곡차곡 꽂히고 쌓인 책들은 조명이 깜빡거리는 시간 동안 재빠르게 눈꺼풀을 들고 얼굴을 내밀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물방울 모양의 파란색 조명이었다. 뜨개질을 해 만든 것처럼 보였다. 파란색 조명은 짙은 색 목재 선반과 책장으로 자칫 어둡게 느낄 수 있는 서점의 공기를 시원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파란색 조명에서 눈을 돌리자 독립출판 잡지들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둔촌, 주공아파트」도 있었다. 동네서점 여행을 시작할 거라는 나의 말에
동네서점에는 동네가 있나요?
라고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던 후배가 생각났다.
나는 ‘이 곳은 동네서점이고 이 책에는 진짜 동네가 담겨있어.’ 라는 메시지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을 후배에게 전송했다.
책 테이블에는 그래픽 잡지가 유난히 많았다. 해외 잡지도 꽤 많았고 그중 일본 잡지가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지금 일민미술관에서 한창 진행하고 있는(2016.3.25.-5.29)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에 <더 북 소사이어티>가 참여한다는 포스터를 본 기억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는 입구에 ‘그래픽 디자인’ 전시 도록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제야 <더 북 소사이어티>가 독립출판사 미디어버스(Media Bus)가 운영하는 서점이라는 게 떠올랐다. 이 외에 다른 전시 도록도 찾아 볼 수 있다. 전시 도록은 전시가 열리는 곳에서 판매되는데 전혀 다른 장소에서 이렇게 가지런히 모여 있다니. 전시회를 하며 전시 콘텐츠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출간하는 전시 도록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새로웠다.
서점 입구의 초록색 문서점 안에서 바라 본 입구와 독립출판물, 잡지 진열 모습
책이 머물고 사람이 머물다
그렇다고 이 서점이 독립출판물이나 도록만 다루는 건 아니다. 건축 및 예술 서적과 문학 단행본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다만 대형 출판사의 책들보다 작지만 알차고 예쁜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 책 위주다. 나는 워크룸프레스에서 발간되는 ‘제안들’ 총서 중 「프란츠 카프카-꿈」을 꺼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널찍한 테이블이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무 테이블 앞은 열람용 도서가 구비 외어 있는 공간이다. 이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꼭 책을 사러 오는 소비 목적이 아니라도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길 바라는 주인장의 배려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책장에 꽂혀 책등이 보이는 책들의 제목을 하나씩 속으로 읽어 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책도 있었고 소장하고 있는 책도 있었다.
책 제목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이야기는 오롯이 나에게만 전해지고 있었다.
책 테이블에 놓여있는 책들
그때 활짝 열려있는 초록 문틈으로 외국인 커플이 들어왔다.
경복궁 영어 브로슈어가 주머니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걸로 보아 틀림없는 관광객이었다. 한국을 찾은 관광객이 이런 동네서점에 들르다니. 눈에 띄는 간판도 친절한 설명도 없어 찾기 힘든 곳인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유창한 영어실력도, 뻔뻔한 낯짝도 가지지 못한 나는 궁금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그들을 살피었다. 어떤 책에 시선이 멈추는지, 어떤 책을 손에 드는지 궁금했다. 해외 잡지와 서적들도 꽤 놓여있지만 이들은 한국어로 제목이 쓰이고 큰 사진이 박힌 책에 흥미를 보였다. 이들처럼 서울의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더 많은 해외여행자가 동네의 구석구석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문학, 예술, 인문 서적이 진열된 서가
1월 25일에 멈춰진 시간
고른 책을 구매하기 위해 계산대로 갔다. 먼저 계산을 하고 있던 손님이 매니저와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는 사이, 운 좋게도 1월 25일에 멈춰진 달력을 찾았다.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1월 25일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도 모르게 나만 찾은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서점 안을 둘러보니 왠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보였다.
모두 천천히 자신만의 시간으로 책장을 넘겼고, 이 봄날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1월 25일에 멈춰진 시간이 있는 <더 북 소사이어티>
오프 투 얼론 Off to (_)Alone
통인시장의 끝자락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 나와 다음 여행지로 <가가린>이란 서점에 가려고 했다. 바로 근처였지만 혹시 몰라 적어둔 주소를 지도에 찍어 찾아갔다. 주소는 분명 맞는데 <가가린>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주변을 살피었지만 역시 없었다.
아, 없는 게 아니라 없어진 거였어.
알고 보니 <가가린>은 이미 폐업한 후였다. 동네 사람들 여럿이 모여 만든 서점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쉬웠다. 독립출판물 서점의 1세대이자, 꽤 유명한 서점이었는데 버티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냥 주인장이 더 즐거운 일을 찾아 그만둔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쉬웠지만 대신 나의 오늘 여행은 좀 더 여유로워졌다. 서촌을 여유로이 산책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싱그러운 봄날의 서촌을 천천히 걸어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다음 여행지는 통인시장을 지나야 한다. 통인시장 상점에는 무얼 파는지 두리번거리며 걷다보면 금세 시장 끝자락에 도착한다. 그 끝자락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북문 1을 놓치지 말자. 북문 1 사이로 산업화를 고스란히 겪은 골목이 보일 것이다. 문을 지나면 바로 내가 찾는 여행 장소 <오프 투 얼론>이 있다.
오래된 벽돌 한옥 한편에 위치한 <오프 투 얼론>은 투명한 유리창으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시장 상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보기엔 수첩이나 예쁜 무언가를 파는 소품점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프 투 얼론>은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이다.
내부는 기둥과 보, 지붕틀을 짜듯 각 목재로 틀이 만들어져 있다. 벽과 천장, 바닥 모서리와 목재 구조 틀이 이중으로 겹쳐 있는 모습이다. 코쿤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야외 프리마켓의 천막 속에 들어온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작은 공간이 하나인 듯 두 개인 듯 나누어 준 것도 목재 틀이다.
<오프 투 얼론>은 목재 틀을 활용해 전체적인 서점 공간을 꾸미고, 액자를 걸고, 소품을 놓고, 모빌을 걸어 두었다. 일러스트 그림을 오려 실을 묶어 만든 모습이었다. 목재 틀에서 같은 목제의 선반을 덧대어 책도 전시하고 있었다. 색도 코팅도 하지 않은, 표면 가공이 안 된 목재가 독립출판이라는 날 것의 문화와 만나 잘 어울렸다. 세련된 나무 무늬를 가진 고급스러운 목재를 사용했다면 지금의 아늑한 <오프 투 얼론>의 느낌이 퇴색되었을 것이다.
<오프 투 얼론> 간판과 밖에서 본 서점 내부
오프 투 얼론으로 놀러 오세요
<오프 투 얼론>, 실제 서점 명칭은 off to (__) ALONE 이다. 과연 무슨 뜻일까. 특히 아랫줄은 무슨 의미일까. 'off to' 는 ‘어디로 갈 예정이다’, ‘ALONE’은 ‘혼자, 다른 사람 없이’ 라는 뜻인데, 그럼 ‘혼자 어디로 갈 예정이다’, ‘혼자 어디로 간다’라는 의미일까.
“오프 투 얼론은 무슨 뜻이에요?”
너무 궁금해서 간식을 먹고 있던 주인장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 보았다.
“아, 그게 밑줄이었네요. 빈칸 채우기처럼.”
“맞아요. 오프 투가 어디로 놀러 가다, 어디로 가다라는 뜻이잖아요. 빈칸에 예를 들어 런던을 넣으면 혼자 런던으로 놀러 가다 같은 의미죠.”
"그럼 오프 투 얼론은 여행서점인가요?"
일러스트 독립출판물 서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둘러보니 다른 서점들보다 유난히 작은 사이즈의 일러스트 독립출판물이 많았다. 소품들도 그래픽을 활용한 제품 위주였다. 다른 서점에 없는 독립출판물도 꽤 있었다. 더욱 가볍고, 귀여운, 소소한 내용의 책들이었다. 이런 책들은 어떻게 선택하여 입고하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이 책 저 책을 들춰보며 궁금해하는 사이 주인장은 독립출판물을 가져온 작가와 가져온 책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스페인에서 찍은 식탁 사진과 관련 스페인 단어가 실린 책인가 보다. 주인장과 작가가 너무 신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잠시 나의 궁금증은 뒤로하고, 도둑고양이처럼 그들에게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나는 진열 되어 있던 일러스트 책의 책장을 습관적으로 넘기며, 어느새 스페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작가가 돌아간 후에야 나도 스페인에서 빠져나왔다. 책장을 무심히 넘겼던 책도 다시 꼼꼼히 살폈다. 「파에야」, 「비프스튜」, 「야끼소바」를 주제로 일러스트 그림과 만드는 법 등이 담긴 책이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궁금함도 되살아났다.
“다른 서점에서 못 봤던 출판물이 꽤 있어요. 출판물은 어떻게 선정 하세요?”
<오프 투 얼론>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는 일러스트 책과 여행 책들 푸드 일러스트 에세이 책
책인 듯 책이 아닌 듯
책의 형태를 띤 출판물 외에 브로슈어와 노트, 메모장 그리고 엽서의 모습을 띤 출판물도 공간 구석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밖에서 <오프 투 얼론>을 봤을 때 소품점 혹은 팬시점처럼 보인 이유였다. 일러스트 출판물을 중심으로 운영하다 보니 유난히 예쁜 표지가 많고, 글씨보다 그림이 많은 것도 이유일 것이다.
독립출판물은 정해진 형태도, 내용도, 규격도 없다 보니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만든 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독립출판물. 보는 사람, 읽는 사람 보다 어쩌면 만드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이 대중서적과 가장 다른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개인이 저렴하게 소량으로 제작하거나 직접 제작하므로 눈으로 보이는 퀄리티는 다소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나 감성, 상태, 생각, 철학, 가치관을 훔쳐보는 재미는 더욱 쏠쏠하다. 어떨 땐 만든 이가 나와 너무 비슷할 것 같아 ‘와, 나도 이래.’ 놀랍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나와 너무 달라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독립출판물이 쓱 대충 지나치며 보면 ‘별거 없네.’ 생각이 들지만, 천천히 살피면 피식 웃음이 나고 지갑을 열게 하는 이유이다.
<오프 투 얼론>을 둘러보며 가장 나를 미소 짓게 한 사랑스러운 책 한 권을 샀다. 또 오겠노라 주인장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근처 생선가게에서 바람을 타고 흘러 온 생선 비린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동네 여행이란 이런 맛이지.
시장에서 시장 냄새가 나야지. 그래야 여행 온 기분이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독립출판물과 소규모 출간물 그리고 종이 모빌다양한 형태의 독립출판물과 소품들
디귿집 Digeut house
한옥의 재발견, 한옥 게스트하우스
동네서점 근처에 자리 한 예쁜 한옥에 들러보기로 했다. 이름이 너무 예뻐 가보고 싶었지만,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고 있어 미뤄둔 <디귿집>이다.
<디귿집>은 주인장이 살고 있는 공간을 나누어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집 이름에서 알 수 있듯, ㄷ자 모양의 중정이 있는 한옥이다.
이 예쁘고 아담한 집은 여행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간만 나누어 주는 일반 게스트하우스와는 조금 달랐다. 게스트하우스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공간을 지향한다. <디귿집>은 새로운 형태의 게스트하우스이자 새로운 개념의 복합문화공간인 것이다.
<디귿집>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한복
<디귿집>은 안방과 안방 건너에 있는 건넌방,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다락방과 주인장이 거주하는 별채, 삼촌 방과 공유 공간인 거실과 중정, 부엌,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디귿집>에서 가장 큰 안방은 거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부엌과 화장실이 드나들기 쉬운 위치였다. 다락방은 바닥 레벨이 낮은 부엌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장 아늑한 공간이었다. 나무 선반에 주인장이 골라 놓은 책도 꽂혀있어 더욱 마음이 드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디귿집>에 머문다면 건넌방에 머물고 싶었다. 건넌방 역시 거실과 바로 맞닿아 있는 것은 물론, 중정 쪽으로 문이 나 있어 거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방을 드나들 수 있으며, 햇빛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한옥의 장점과 매력을 다 느낄 수 있는 방이었다. <디귿집>은 중정과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이 마주하고 있고, 사람들이 집안에서 부딪치며 마주할 수 있는, 사람 사는 냄새가 짙은 집이다.
거실과 건넌방거실에서 본 안방
시문에 능한 이웃들이 모이는 곳
<디귿집>이 다른 게스트하우스와 가장 다른 이유는 <디귿집>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이 공간을 채워 나가기 때문이다. 이는 <디귿집>이 지향하는 두 가지 개념과 맞닿는다.
그 첫 번째는 ‘이웃 또는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냄, 또는 그러한 이웃’ 이라는 뜻의 ‘선린(善隣)’이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주민들과 인접한 상점들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주인장의 마음이 묻어난다. 주변 베이커리·커피·가구·비누·도예·조향 상점에 휴식공간과 회의 장소로 <디귿집> 공간을 제공하고, 상점을 홍보할 수 있는 제품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 놓인 목가구도 이웃 공방에서 만든 가구이고, <디귿집>에서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 품 안에서 나던 냄새를 떠오르게 하는 ’그윽‘이란 이름의 향도 이웃 조향사가 디퓨즈와 룸 스프레이로 만들어주어 사용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시문에 능한 재인들이 모인 곳’이란 뜻을 가진 ‘봉혈(封穴)’이다.
각기 다른 분야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인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계절과 시간을 느끼기 좋은 한옥의 장점을 살려 5월부터 12월까지 ‘사시사색’이라는 연간 프로그램으로 사진전과 공연, 한복 전시 등이 열리고 있었다. 한 해 동안 변해가는 계절의 첫마디에 스톰프 뮤직의 오프닝 공연으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거실에 전시되어 있는 향수와 디퓨즈
사회도 개인도 색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색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보면서 자신의 색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디귿집
<디귿집>을 찾는 게스트들은 단지 하룻밤 묵어가는 숙박 장소로서가 아니라 서촌을 즐기고, 한옥을 즐긴다. 주인장은 게스트가 온전히 <디귿집>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 공간과 프로그램, 이웃들의 상품과 상점 설명 등도 진행한다. 그리고 게스트는 다른 게스트들과 마주치며 새로운 <디귿집>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 이야기는 주인장이 마련한 ‘디귿집 편지’에 남기기도 한다. 편지를 남기면 주인장은 작고 예쁜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다시 게스트에게 준다. <디귿집>에 머문 시간과 이야기를 담아 선물하는 것이다.
<디귿집> 설명서와 편지
이상의 집 Isang house
이상을 기억하기 위한 집
<디귿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서촌 골목에서 우연히 또 다른 집을 발견했다. <이상의 집>, 이름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상의 집>은 천재 작가 이상이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던 집 ‘터’의 일부에 자리한 문화공간이었다.
이 가옥은 그가 실제 살았던 집은 아니지만 이상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한다. 근대 한옥을 개조해 이상에게 헌정하는 집을 남긴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무료 개방한 공간으로, 최소한의 프레임을 가진 전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작은 도슨트 부스와 8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모서리가 닳고 칠이 벗겨진 벽과 벽을 제거한 흔적을 그대로 두어 자유로운 이상과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테이블 옆에는 이상의 책과 이상과 관련된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자유롭게 꺼내 볼 수도 있고, 도슨트 부스에서는 이상이 그린 그림과 사진을 담은 엽서를 구매할 수도 있었다.
<이상의 집> 입구와 도슨트 부스
테이블 뒤로 보이는 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가니, ‘이상의 방’이 나왔다. ‘이상의 방’에선 이상과 관련된 영상이 계속 상영되고 있고, 좁고 어두운 계단이 있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 중정과 인왕산의 일부가 보였다. 주변의 높은 건물로 인왕산의 제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이상의 집>을 한눈에 내려다보기엔 좋은 공간이었다. <이상의 집>도 ㄷ자형이었다.
이상의 작품을 보면 공간 감각이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 실무를 했던 개인의 체험이 건축학에 기반 한 기호학적인 모습으로 작품에 드러났기 때문이겠다. 그래서 이상과 관련 된 공간은 가장 현대적이고 어쩌면 모던을 넘어 해체건축이 더 어울릴 거라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날 것의 느낌을 가진 근대한옥이 이상과 잘 어울리다니. 마치 그가 살던 시대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천재 작가 이상(李箱, 1910-1937). 난해한 시와 소설을 발표하며 당시 큰 화재를 일으켰던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 기수 일을 하며 《조선과 건축》지에 시를 발표했고, ‘건축무한 육면각체’ 등 지속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모더니즘이 시작되던 당시 쓰인 그의 작품들은 지금 보아도 참으로 현대적이다. 물질화된 현대인의 삶과 소외,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그를 천재 작가라 부르는 이유인 것 같다.
금홍과의 연애나 다방 운영 등의 생활로 자유스러운 모던보이의 대표 격으로 기억되지만 그에 반해 너무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는, 나에게 근대문화와 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한 작가이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박태원은 물론 구인회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게 하고, 현대성이 형성되며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나타나던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책과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게 된 계기를 가져다준 작가이다.
이상과 관련된 책들 '이상의 방'에 들어가는 철문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숨이면 머릿속에 의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 이상, <날개>, 민음사
여름엔 시원한 차를, 겨울엔 따뜻한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며 가끔 문화행사가 일어나는 집. 서촌에 간다면 <이상의 집>에 들러보자.
글/사진 구선아 · 일러스트 이예연
기획/제작 퍼니플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