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훔치는 여자... 책방 풀무질과 나 #2

 시집 훔치는 여자... 책방 풀무질과 나 #2

시집 훔치는 여자... 책방 풀무질과 나 #2

작은 책방 지키기 25년! 도서출판 '한티재'가 동네서점 포스트에 1년간 연재해 온 성균관대학교 앞 ‘책방 풀무질’ 책방지기 은종복의 오래되고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동네서점브릿지

책방을 하면서 책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숲노래

책방을 시작하고 한 해가 지난 1994년 봄의 일이다.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던 날 아침 9시. 출근하자마자 출판사로 전화해 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20대 초반 나이 여자가 책방에 들어왔다. 서가에서 시집을 꺼내 읽었다. 나는 주문하느라 바빠 눈인사만 살짝 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인사도 없이 책방을 조용히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는 옆모습만 슬쩍 봤다.

10분쯤 지났을까.
이번엔 머리카락이 짧은 20대 초반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남자가 준 시집을 받았다. 나는 놀랐다.

책방 풀무질 계단 정면에 새 책 알림판이 있어요 ⓒ 책방 풀무질

“아저씨, 조금 전에 어떤 여자가 여기 들어오지 않았나요. 그 사람이 이런 작은 책방에서는 책을 훔치면 안 되겠다고 하면서 이것을 돌려주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
그 여자가 다시 책방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시집 한 권을 사 갔다. 나는 눈썰미가 좋아서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모르는 척했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말도 걸었다. 그렇게 한 달에 한두 번은 책방에서 시집을 사 갔다. 2, 3년간 계속 책방에 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아니었다. 아무튼 눈빛 맑고 수줍음을 많이 탔다.

20년도 지난 일이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책방을 하면서 책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작은 책방을 꾸리는 사람으로서 책이 자꾸 없어지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누가 책을 훔쳐 가는지 일일이 감시하진 않는다. 가끔 23년 전 시집 한 권을 훔쳐 갔다 돌려주던 눈빛 맑은 그녀가 생각난다. 시내 큰 서점에서는 책을 훔쳤을까, 혹시 시집을 좋아하더니 지금은 시인이 되었을까?

내가 책방을 처음 열 때 나이가 28살이다.
지금은 53살. 그녀도 이제 40대 중반 나이겠지. 어디서 무엇을 할까. 혹시 그 뒤로도 책방 풀무질에 왔었는데 내가 몰라 본 걸까. 혹시 그녀가 이 글을 읽고 책방에 들러 “제가 1994년 봄에 시집을 훔쳤다가 돌려준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마음이 고우니 아마 좋은 시인이 되었으리라. 큰 서점에서 훔친 책도 다 돌려주었으리라.

나는 이런 생각에 책방을 힘차게 꾸린다.
책방에서 마음 다치는 일이 있으면 그녈 떠올리며 달랬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고 혼잣말을 한다.


시집을 읽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글 내용과 상관없음) ⓒ 책방 풀무질

그런데 2014년 가을쯤에 책방 풀무질에 안 좋은 일이 터졌다.
책방 풀무질에서는 책을 알리려고 책방으로 들어가는 계단 정면에 책을 여러 권 깔아 놨다. 모두 새로 나온 책들이다. 한 달에 한 권쯤 없어졌다. 그러려니 했다. 어느 날에는 대 여섯 권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책방 안에 있는 책들도 눈에 띄게 없어졌다.

주말 아침 출근길에 새로 생긴 중고서점에 들어갔다.
성균관대로 들어오는 길 맞은편에 한 인터넷서점에서 꾸리는 대형 중고서점이 들어섰다. 그곳에선 헌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새 책도 많이 판다. 입구 오른쪽 벽면에 최근 들어온 책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보고 놀랐다. 풀무질에서 없어졌던 책들이 고스란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 직원에게 내가 잃어버린 책 중 한 권을 뽑아 그 책 판 사람을 알려 달라고 했다. 목록을 주었다. 더욱 놀랐다. 그 사람이 그날 판 책만 20권이 넘었다. 모두 최근 발행된 새 책 들이고 내가 잃어버린 책이 반 이상이었다.

중고서점엔 간혹 새 책도 들어와요 ⓒ 책방 풀무질

다음 날, 그 책들을 사려고 중고서점에 다시 갔다.
장물로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더욱 놀랐다. 세 권만 남고 모두 팔렸다는 거다. 그곳에 새 책이 들어오면 바로 인터넷 전자 누리집에 올리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바로 사러 온다고 한다. 그곳은 책값을 아주 후하게 쳐주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이고 한 번도 안 본 깨끗한 책, 사람들이 많이 볼 것 같은 책은 정가의 50%로 그 자리에서 현금 구매했다. 이러니 새 책을 훔쳐다가 중고서점에 되팔 수도 있겠구나 싶다.


우리 책방에서 없어진 책들도 모두 위 세 가지를 충족했다. 그래서 바로 팔렸다. 나는 그때까지 팔리지 않고 남은 책 세 권을 내 돈 주고 사 왔다. 내가 잃어버린 책을 내가 다시 사 오다니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있나.

감시용 카메라를 뒤져 범인을 찾았다.
그 책 판 사람은 책방 풀무질 손님이었다. 성균관대 학생은 아니고 40대 초반 남자였다. 나는 그를 고발할까 생각하다 그냥 두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두 달쯤 뒤 그 남자가 책방 풀무질에 왔다. 내가 물었다. “요즘 무슨 일 하세요?” “뭐, 별 볼 일 없는 일하지요?” 참 맞는 말이다. 책을 훔쳐다가 파는 일이 어찌 떳떳하겠는가.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지만, 23년 전 시집 훔쳤던 여자와 비교하면 이 남자는 참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그 사건 후 책방에 오는 손님들은 내게 조언했다.
“CCTV를 설치해라”, “반사거울을 붙여라”, “이상한 손님이 오면 의심해라"라고. 나는 책방 풀무질은 그런 것 안 하려고 책방을 열었다. 도시 사람들이 집 나서면 하루에 약 24번 감시용 카메라에 찍힌다고 한다. 그것이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겠지만 나도 모르게 의심받는다고 생각하면 정이 떨어진다.

책방 풀무질에는 감시용카메라가 없어요 ⓒ 책방 풀무질

책방 풀무질 운영하며 책을 수백 권 잃어버렸다.
하지만, 책방 풀무질만큼은 그런 곳이 되지 않아야 한다. 책방 풀무질은 손님이 책을 읽고서, 사지 않고 그냥 나가도 눈치 주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온 낯선 사람과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책방 일 마치면 술도 함께 먹는다. 책방 일꾼이 쓴 시와 글을 읽어 주고 나눠 준다.

그 힘은 23년 전에 시집을 훔쳐 갔다 돌려줬던 그녀가 떠올라서다.
이 글을 읽는다면,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2017년 1월 27일 금요일, 설날 하루 앞날 수유리에서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 사진 숲노래

 시집 훔치는 여자... 책방 풀무질과 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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