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 학생의 가방이 쌓인 자리... 책방 풀무질과 나 #3

성대 학생의 가방이 쌓인 자리
... 책방 풀무질과 나 #3
“형, 이거 이따 찾아갈게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만 던져 놓고 나갔다. 한쪽에 쌓이기 시작한 책가방이 수백 개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먹먹해서 말을 할 수 없다. 작은 책방 지키기 25년! 도서출판 '한티재'가 동네서점 포스트에 1년간 연재해 온 성균관대학교 앞 ‘책방 풀무질’ 책방지기 은종복의 오래되고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동네서점브릿지
©숲노래©숲노래
1991년 5월 25일 일요일 낮 12시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는 봄비가 솔솔 내렸다. 일요일이라 한산한 찻길에는 젊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각목을 손에 움켜진 대학생이 찻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서, 1분도 안 돼서 몇천 명이 모였다.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시위대는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 말고도 시민들의 수도 갈수록 많아졌다. 대한극장 앞 8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모두 자리에 앉아서 구호를 외쳤다. ‘민중 생존 압살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학살 정권 몰아내고 사람답게 살아보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시위대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면 모두 따라서 외쳤다. 노래도 힘차게 불렀다. 학생들이 유인물을 길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쳐도 전투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 우리의 다리 저절로 둥실 해방의 거리로 / 달려가누나~ 아~아~ 우리의 승리~ /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 싸워나가리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 날 위해~.'
1991년 5월 4일 노태우 정권 퇴진과 백골단 해체 요구 가두시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30분쯤 지났을까. 대한극장 위 명동 쪽 오르막길에서 시커먼 장갑차 5대가 옆으로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내려왔다. 일명 '지랄탄 차'다. 이 차는 최루탄을 한꺼번에 50발 가까이 쏠 수 있다. 큰 고추만 한 자루에서 최루가스가 나오면서 지랄하듯이 움직여서 '지랄탄'이라 불렀다. 그 차들이 검은 구름처럼 서서히 다가오자 길에 앉아서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은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백골단'이 보였다. 흰색 철모를 쓰고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경찰이다. 그들은 어른 팔 길이 보다 더 긴 방망이를 들고 방독면도 쓰지 않았다. 시위대를 현장에서 잡으려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시위대는 공포에 휩싸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골목으로 도망쳤다. 시위대 머리 위로 '지랄탄'이 뿌옇게 내려앉았고 백골단이 휘두르는 곤봉과 방패에 사람들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무너지면서 쓰러졌다. 나는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학교 안까지 들어와서 시위학생을 끌고 가는 백골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누군가 나서 '2차 텍'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삼삼오오 그 길에서 빠져서 청량리역으로 갔다. 저녁 6시에 그곳에서 집회가 잡혔다. 그때는 손전화기도 삐삐도 없을 때여서 미리 어디서 몇 시에 만나는지 정보를 나눴다. 대한극장에 낮 12시, 청량리역에서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밤 9시. 이런 식으로 미리 약속했다. 그것을 ‘텍’이라 불렀다.
"사람이 죽었어요."
“성균관대 학생이라고 해요. 지금 백병원으로 모여 주세요.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려 해요.”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어느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지하철에는 싸한 느낌이 돌았다. 믿을 수 없었다. 서둘러 백병원으로 갔다.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성균관대학교 불문과 4학년 여학생 김귀정은 경찰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6살이었다.
김귀정 열사는 지금 내 가슴에 살아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날도 비가 내렸다.
1991년 김귀정 열사 추모식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경찰은 상복 입은 여학생들이 성균관대 정문으로 못 나오게 막았다. 그러자 여학생들이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목 놓아 울었다. 그날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열 사람씩 열을 서서 맨 앞사람이 창경궁을 지나 광화문 앞까지 갔는데 아직도 추모 인들이 성균관대 정문을 전부 다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울면서 걸었다.
내가 책방 풀무질을 연 1993년 봄에도 추모집회는 이어졌다. 학생들은 성균관대 안 금잔디광장에서 추모식을 하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었지 사람들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노동자 피 말리는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 열사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앞당기자!’ 낮 3시쯤 되면 김귀정 누이 영정사진을 앞세우고 풍물패가 길잡이를 하면서 수많은 시위대가 뒤를 이었다.
김귀정 누이 추모 집회에 10만 명 넘게 모였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형, 이거 이따 찾아갈게요.”
성대 학생들은 낮에 학교로 왔다가 추모 시위대를 만나면 가방을 책방 풀무질에 던져 놓았다.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만 던져 놓고 나가서 시위대에 뭉친다. 그때 책방은 4.5평이었다. 사람 몇이 들어오면 몸이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곳 한쪽에 쌓이기 시작한 책가방이 수백 개였다. 책가방이 쌓인 곳은 책을 팔 수 없을뿐더러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없었다.
명동 백병원까지 갔던 시위대는 저녁 7시쯤 삼삼오오 돌아왔다. 그들이 가방을 찾으러 책방 풀무질에 들어오면 최루 냄새로 눈물 콧물이 마구 흘러 나왔다. 어떤 학생들은 책가방을 잘못 찾아갔다. 술을 마시다 밤 9시, 10시 넘어서 자기 가방이 아니라고 다시 책방에 와서 놓고 자기 것을 찾아갔다. 3일은 지나야 모두 자기들 가방을 제대로 찾아갔다. 가끔은 시위하다가 잡혀서 일주일 넘게 책방 풀무질에 가방이 있는 적도 있었다.
이 자리에 김귀정 누이 추모 집회 날이면 학생들 가방이 산처럼 쌓였다. © 책방 풀무질
나보다 어린 그가 나보다 먼저 갔다.
성균관대학교 안에는 누이 추모비만 쓸쓸히 서 있다. 누이 무덤은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다가 지금은 경기도 이천 민족민주 열사들이 있는 새 묘역에 가 계시다. 김귀정 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밥도 먹을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다.
그냥 먹먹해서 말을 할 수 없다...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아침 누이를 그리워하며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 사진 숲노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성균관대학교 내 김귀정 열사 추모비 © 책방 풀무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