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지도 1 | 천 권의 시집, 천 개의 세계 <청색종이>

 문래지도 1 | 천 권의 시집, 천 개의 세계 <청색종이>

문래지도 1 | 천 권의 시집, 천 개의 세계 <청색종이>

다시 떠나볼까, 〈여행자의 동네서점〉으로 지난 해 9월 초판 발간 후 1년이 지났습니다. 1개의 새 코스를 추가하고, 6곳의 새 스팟 이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금, 도시 속 동네서점으로 착한 여행을 떠나볼까요?

텍스트가 살아있는 곳, 문래동의 동네서점
문래동은 일제 시대 방직 공장이 많았던 동네다.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와 물레 제작을 하던 사실에서 이름을 따 문래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철강공장, 철제 상이 밀집하게 되었다.

철강 산업의 메카였던 문래동이 어떻게 현재 문래 예술촌이 된 것일까. 80년대 후반과 90년 초반의 문래동은 국내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심각했던 지역이었다. 이 시기와 맞물려 서울시는 철강 판매 상가를 외곽으로 이전시키려 했고, 이후 문래동의 철강 산업은 점점 쇠퇴하며 빈자리가 늘어갔다. 저렴한 작업 공간을 찾던 예술가들이 이 빈 곳을 메우기 시작하며 지금의 문래 예술촌이 형성되었다.

현재, 문래동에는 100여 개 작업실과 약 200명의 예술가가 활동 중이다. 하지만 재개발이라는 이슈가 문래동 역시 달구면서 예술가의 활동 영역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최근 홍대 앞과 같은 지역문화 예술인들의 이탈현상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 문래동 여행을 시작했다.
① 청색종이 → ② 사진문화공간 아지트 → ③ 부비책방

텍스트가 살아있는 곳, 문래 여행자의 동네서점 지도 © 퍼니플랜

청색종이 Blue Paper

날것의 느낌, 문래동
문래동은 문래 근린공원으로부터 문래동 우체국 방향의 도림로 128길을 기준으로 높은 건물과 낮은 건물 구역으로 나뉜다. 이번 여행은 낮은 건물 구역과 문래동에 올해 초 새로 생긴 동네서점에 들러볼 작정이다. 양남 사거리에서 문래동 우체국 뒤편으로 가는 오밀조밀한 골목길에 벽화가 보였다. 어떤 벽화는 어릴 적 책상의 낙서 같았다.

문래역 주변의 유명 건설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자리는 불과 이삼십 년 전엔 큰 규모의 방직 공장 단지였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골목과 골목 사이, 일부 철강소와 금형 공작소만이 남아 쇳소리를 내고 있다. 몇몇 곳은 문을 닫았으며, 또 몇몇 곳은 음식점과 공방이 최근에 들어섰다. 깨진 시멘트 바닥, 바닥에 남은 녹물 자국, 깨진 타일, 버려진 의자 등 문래동은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좋았다. 계획된 길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골목이라 자유로운 방향과 넓이로 흩어지고 모이는 골목이 흥미로웠다.

이 문래동 골목에 시인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이 있다. 지하철 문래역에서 7분 거리다.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문래예술창작촌 표지판을 따라 걷다, 건널목을 건너자. 어깨가 닿을 듯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골목 끝에 파란 대문과 능소화가 걸린 <청색종이>가 기다린다.

<청색종이>의 외부 © 구선아


천 권의 시집, 천 개의 세계
<청색종이>는 문래동의 다른 공장 2층에서 출판사로 먼저 시작하여 작년 1월 출판사 겸 동네서점으로 문래역에서 가까운 골목에 자리 잡았다가 올해 8월 파란 대문과 마당이 있는 현재 자리로 옮겼다.

'침묵정원'이라 이름 붙여진 몽글몽글 한 자갈이 깔린 마당과 골목을 드나드는 바람 소리가 들릴 듯한 대청마루, 문래동 공장 지붕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 평 옥상 그리고 나무 마룻대와 보가 인상적이다.

시인이 운영하고 있어서일까, <청색종이>엔 유난히 ‘시(詩)’가 많다. 입구부터 누구나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예쁜 시 한 편이 꽂혀있다. 시인은 매주 수요일마다 직접 쓴 시를 인쇄해 배포한다.

한 사람이 온다
골목 앞집 오동나무의 느짓한 가지 사이
아직 잎사귀를 틔우지 않은 얼굴로
단 한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가 되려고
모르는 얼굴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책장 사이로 조금은 비켜 서 있다
한 사람이 있다 단 한 사람이
봄볕으로도 제비꽃으로도
오래된 시집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 《손님》, 김태형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 맞은편에 정갈하게 자리 잡은 ‘천 권의 시집’이 보인다. 천 개의 세계가 모여 있는 아우라다. 한 권의 시집을 펼치면 그 하나의 세계가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청색종이>의 서가 © 구선아

시인 주인장
주인 없는 서점을 엉거주춤 구경하는 사이, 나를 먼저 발견한 주인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청색종이>의 주인장은 김태형 시인이다. 김태형 시인은 1992년 시 《로큰롤 헤븐》으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겨울, <청색종이>에서 자신의 산문집 「하루 맑음」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도 책방을 운영하며 꾸준히 자신의 작품을 쓰고 있다.

나는 시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즐겨 읽지 않게 됐다. 하지만, 아주 가끔 메마른 단어만 쏟아내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면 시집을 들추곤 한다. 김태형 시인의 시는 문래동에 오며 찾아 읽게 됐다. 그의 시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시는 《이루어진 말》이다.

들판은 눈이 있고 숲은 귀가 있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내게 가만히 고이더라
들판에선 눈이 되고 숲에선 귀가 되지 그게 나였으니까 그 말엔 내가 있으니까 곁이 있으니까 들판이 아니라 숲이 아니라 내가 있으니까
바라다보는 끝닿은 곳에 지평선이 한 줄 그어져 있으니 아무리 세상이 둥글어도 내게는 단 한 줄만 그어져 있으니 그곳으로 건너가는 눈빛은 참 멀어져야 했으니
나무 뒤에 나무들이 있어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가만히 양치류처럼 귀가 자라나고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은 들을 수 없는 소식들 그럴수록 귀는 나무 뒤로 멀어지고 귀가 멀어서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뿐
내가 되고 곁이 되고 이 세상이 되어서 오래된 말은 내일도 오래된 말이 되고 또 오래된 말이 되고

- 《이루어진 말》, 김태형

한편에서 시인의 책을 뒤적이는 사이, 시인은 따뜻한 민들레 차를 내주셨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자라났을지도 모를 '민들레' 꽃이다. 책 냄새에 민들레 향기가 더해져, 향긋한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헌책 냄새, 글자 냄새
이곳에 시만 가득한 건 아니다. 시집 외에도 인문서, 예술서를 갖추고 있다. 들뢰즈, 칸트, 바슐라르의 미학, 철학 서적은 물론 국내 근대소설과 요즘 잘 나가는 산문집이나 수필까지 다양하다. 특히 흥미로운 건 헌책과 구하기 어려운 절판 도서 그리고, 초판본도 있었다.

천 권의 시집이 꽂혀있는 책장과 벽면 책꽂이 모두 절판 도서가 중간중간 보물처럼 꽂혀있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주인장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란다. 주인장이 소년 시절 용돈을 쪼개 산 책부터, 시인이 되고 난 후 최근까지 수집하듯 전국을 뒤져 산 책도 있다.

“소장하고 있던 책을 팔면 아깝지 않으세요?”라는 나의 지극히 물욕 적인 물음에 “팔아서 사고 싶었던 다른 책을 사요. 책을 사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라며 대답하는 주인장. “처음 책방을 열 때, 아내가 당신이 읽는 책은 재미없어서 아무도 안 살 거라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다들 아는지, 좋은 책은 다 골라가더라고요.”

헌책은 특유의 냄새가 있다. 새 책과는 다른 냄새다. 누군가의 손길이 묻어있는 냄새가 난다. 책 사이에 메모나 엽서가 끼워져 있다면 선물 받는 기분이 든다. 다른 누군가의 취향과 시간이 남긴 냄새가 남아 있다는 것, 이것이 헌책의 매력이다. 꽂힌 책을 훑어보며 주인장의 취향을 살폈다.

시집이 놓인 작은 책상, 책을 읽거나 모임을 하는 테이블 그리고, 민들레 꽃차 © 구선아

<청색종이>는 인문학 강좌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편안히 책 이야기를 하는 ‘책방모임’과 주인장이 직접 시 창작 수업을 하는 '목요시詩회', 책을 통해 인문학 알기 '인문독회' 그리고, 함께 영화를 즐기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그리 공간이 넓지 않아 열네 명 정도가 들어서면 꽉 찬다. 그래서, 더 따뜻한 공간이 된다. 최근에는 이명랑 소설가와 함께 팟캐스트 ‘책방에서 문학하다’ 진행도 시작했다.

문래예술창작촌 철강소 옆에서
철강만큼 단단한 시를 짓다
시는 당신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프로그램 그램 안내 문구조차 한 편의 시 같은 이 작은 책방,
소탈하고 진심이 있는 동네서점 <청색종이>다.

작가 구선아 | 출판 퍼니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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