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에 서점을 열다 -책방 풀무질과 나 #1

 만우절에 서점을 열다 -책방 풀무질과 나 #1

만우절에 서점을 열다 -책방 풀무질과 나 #1

작은 책방 지키기 25년! 도서출판 '한티재'가 동네서점 포스트에 1년간 연재해 온 성균관대학교 앞 ‘책방 풀무질’ 책방지기 은종복의 오래되고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동네서점브릿지

내가 책방 풀무질을 처음 연 날은 1993년 4월 1일이다. 그날은 서양 속담으로 만우절이다. 거짓말을 안 했던 사람들이 그날만큼은 거짓말을 해도 용서를 해 준다는 날이다.

나는 대학을 겨우 졸업했다.

대학을 다닐 때 학과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졸업 평점이 1.5쯤 되었을 것이다. 100점 만점에 30점쯤 되려나. 아무튼, 낙제점으로 학교를 마쳤다. 그 대신 세 가지를 열심히 했다.

글을 쓰거나 술을 마시거나 데모를 했다. 책도 열심히 읽었다. 방학 때 사회과학 공부를 하려고 책을 열 권 넘게, 복사물도 그만큼 가지고 갔다. 시골에 사는 후배 집을 골라 낮에는 농사일을 도와주고 밤에 일어나 학습을 했다. 방문에 빛이 안 나가도록 커튼도 쳤다.

또 하나는 하루에 한 편 시를 쓰지 않으면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한동안 아침밥을 안 먹은 적도 많았다. 한 달에 술을 며칠이나 먹는지 날적이를 적었다. 한 달 뒤에 날적이를 들춰 보았더니 술을 안 먹은 날이 며칠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낮술을 마신 날도 꽤 있었다.

데모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대학 안에서 시위가 있었다. 특히 목요 징크스라고 해서 목요일에는 꼭 시위가 있었다. 비가 와서 오늘은 데모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시위대는 꾸려졌고 대학 정문을 달려나가 ‘독재 타도, 미제 축출’을 외쳤다.

각목을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고 돌멩이를 던졌다. 온몸으로 최루가스를 뒤집어썼다. 시위를 마치고 겉옷을 벗어 털면 최루 냄새가 요동을 쳤다. 최루가스를 죄다 뒤집어쓴 머리 때문에 머리카락을 감지 못했다.

성균관대 앞 책방 풀무질 안의 작은 공간에선 다양한 모임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더군다나 책방을 여는 잔치를 4월 1일, 만우절에 한다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나를 아는 후배들은 귀신처럼 술을 마시던 사람으로 나를 기억했다. 학교 앞 비둘기 동산 앞에서 아침부터 술자리를 하는 나를 보던 사람이 그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그곳을 지나치며 걷던 사람들은 나를 술 귀신으로 알았다.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밤을 새워 술을 마시는 귀신이었다. 그곳은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데모를 많이 했던 학생들이 많았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또다시 집회가 있으면 돌멩이를 던지는 나를 보고 더욱 놀랐다.

그런 내가 책방을 연대니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책방 일을 시작했고 성균관대학교 풍물패가 명륜골을 누비며 잔치 흥을 냈다. 내가 책방을 진짜 여는 것을 확인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놀랐다.

책방 풀무질에서 시읽기모임을 마치면 술집에서 뒤풀이가 이어지곤 한다.

그렇게 책방 일을 시작했다.

책방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학교 앞 책방에서 책을 외상으로 샀다. 책만 외상으로 산 것이 아니라 돈도 빌렸다. 술을 마시다 술값이 없으면 돈을 빌렸다. 그래도 다 갚았다.

빌린 돈이 만 원이면 만 원을 갚고 그날 다시 이만 원을 빌리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는 책방만 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집에도 외상이 많았다. 여관집도 외상이 되었다. 돈 한 푼 없이도 하루하루 살 수 있었다.

선배들은 시골 부모님이 수업료를 내라고 돈을 보내주면 후배들 술을 사 주었다. 나도 학교 학보에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글이 나오기도 전에 학보사에 가서 원고료를 미리 받아다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셨다. 그때 돈으로 원고료가 7,000원쯤 되었는데 그 돈이면 서너 명이 술을 2차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때 김치찌개가 1,500원, 소주 한 병이 300원쯤 했다. 내가 피던 거북선 담배 한 갑이 500원. 아무튼 지금 돈으로 치면 30,000원이 넘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 내가 책방 풀무질을 열고 학생들이 나를 알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책방에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눈치를 보며 돈을 빌렸던 기억이 나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토를 달지 않고 바로 빌려주었다. 만 원을 달라고 하면 이 만 원을 주었다. 그것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담아서 주었다.

그때는 책이 잘 팔릴 때여서 그렇게 돈을 빌려주어도 나중에 대부분 갚기 때문에 책방 살림에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돈을 갚지 않는 학생들이 책방에 오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도 얼굴을 피했다. 돈도 잃고 사람도 잃었다.

그래서 나는 원칙을 정했다.

다음 두 가지를 빼곤 돈을 빌려 주지 않기로. 여학생이 밤이 늦어 버스도 끊겼는데 택시비가 없을 때는 빌려준다. 학생들이 몸이 아픈데 병원비가 없을 때 돈을 빌려준다.

그때는 신용카드가 없을 때여서 학생들은 현금이 있어야 했다. 물론 책은 외상으로 많이 주었다. 이런 결정을 내고는 참 마음이 아팠다. 나도 대학 다닐 때 술을 마시고 술값이 없어 책방에서 돈을 빌렸는데 나는 술값으로 쓴다고 하면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책방 살림도 좀 안 좋아졌다. 동구 사회주의권과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사회과학 책들이 덜 팔렸다.

성균관대학교 앞 먹걸릿집 '동학'. 뒤풀이를 하며 노래도 부르고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돈을 갚지 않고 책방 풀무질에 오지 않는 학생들이 열 사람이 넘었다. 나는 다짐을 했다. 꼭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냥 주었다. 받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 주었다. 그렇게 돈을 받아 간 학생들은 돈도 갚았고 책도 사러 왔다.

딱 한 번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 일이 있었다. 그날도 돈을 빌리러 왔다. 밤 9시쯤 되었을까. 술이 어느 정도 취해 있었다, 후배들에게 술을 사 주기로 했는데 술값이 없다면서 30,000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책방에 자주 오지 않았다.

그 학생은 그날 밤 11시쯤 술이 더 취해서 다시 책방에 왔다.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했다. 나는 거절을 했다. 다시는 책방 풀무질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 학생은 그 일이 있던 뒤로 책방 풀무질에 발길을 딱 끊었다. 나를 길에서 봐도 얼굴을 돌렸다. 때론 침을 뱉기도 했다. 나를 그렇게 대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그를 붙들고 그날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그런데 뭐를 어떻게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 학생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도 10년 가까이 명륜동에 살면서 왔다 갔다 했다. 한 해에 서너 번 얼굴을 봤을까. 그때마다 나를 벌레 보듯 했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는 서로를 용서했으면 좋겠다.

그 일이 있었던 뒤로 책방에 오는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지 애를 쓰지만 내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이렇게 책방 일을 한 지 올해로 24년이 넘었다. 다음 책방 풀무질 이야기에는 좀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 글을 만약 그때 돈을 주지 않아서 나를 버렸던 후배가 읽는다면 나는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책방 풀무질은 용서해 주기 바란다. 풀무질은 대장간에 담금질할 때 바람을 일으키듯이, 잘못된 세상에 정의의 불 바람을 일으키는 속뜻이 있으니.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드림.
2017년 1월 6일 금요일 저녁 9시 경기도 용인에서

풀무질 (Pulmuzil)
사회인문과학서점 | 성균관대 앞에서 사회과학서점의 명맥을 튼튼히 잇고 있는 서점이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풀무질놀이터'와 '풀빵', '한평장터'가 함께 있다.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책을 둘러볼 수 있으며 '풀빵'이라 불리는 서점 안의 작은 공간에선 다양한 모임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Mon-Fri 09:00-22:00, Sat-Sun 12:00-21:00 (추석/설 명절연휴 휴무) | 02-745-8891 / 010-4311-6175 74588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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