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 돌아가신 날... 책방 풀무질 마지막 이야기

 권정생 선생 돌아가신 날... 책방 풀무질 마지막 이야기

권정생 선생 돌아가신 날... 책방 풀무질 마지막 이야기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신 날은 비가 추적거렸다. 당신 나이 70살이다.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은 내겐 경전과 같은 책이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내 꿈에 나타났다. 작은 책방 지키기 25년! 도서출판 '한티재'가 동네서점 포스트에 1년간 연재해 온 성균관대학교 앞 ‘책방 풀무질’ 책방지기 은종복의 오래되고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동네서점브릿지

나는 권정생 선생님 뜻을 따라서 산다. ©숲노래

나는 책방 풀무질을 1993년 4월 1일부터 꾸렸다.
책방 일꾼이니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이다. 여러 가지 책을 읽었지만 권정생이 쓴 글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특히 1996년에 나온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펴냄)’은 내겐 경전과 같은 책이다. 그분은 살면서 두 가지에 뜻을 두었다. 하나는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안아 오는 것, 둘은 남북이 평화로운 날을 맞는 일이다.

그 뜻은 고스란히 내가 사는 뜻이 되었다. ‘우리들의 하느님’ 책에는 그런 뜻이 올곧이 들어있다.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안아오려면 어른들 돈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막아야 한다.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려면 한반도 남녘에서 미군은 떠나야 하고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들의 하느님’ 책은 한동안 국방부 불온도서로 낙인이 찍혔다.

선생이 돌아가신 날은 비가 추적거렸다. 책방 일을 하는데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저녁 7시에 책방 풀무질을 나서서 안동 가는 버스를 무작정 탔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어둠이 내렸다. 안동 시외버스정류소에 내려 안동병원으로 발을 옮겼다. 걸어서 20분 길이라 했다. 권정생 뜻을 따르면 걸어가야 했으나 길도 잘 모르고 슬픔으로 머리가 멍해서 눈에 보이는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안동병원으로 가자고 짧게 말을 하고 창문 밖을 보았다. 비는 거세지 않고 일정한 흐름으로 내렸다. 마치 하늘에서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했다. 내 눈에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언젠가 동화작가 박기범이 책방 풀무질에 왔을 때, 권정생 선생님께서 나를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설핏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한겨레신문, 참세상, 오마이뉴스 같은 곳에 가끔 글을 썼는데 그것을 보고 그랬나 싶다.

나도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선생님은 몸이 아프셔서 누군가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은 당신 나이 17살부터 신장결핵을 앓아서 돌아가실 때까지도 오줌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돌아가신 것도 그 오줌길이 막혀서 뚫다가 그렇게 되었다. 올해 밝혀진 사실은 의사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해서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당신이 병을 치료하다 죽더라도 어떤 의료분쟁도 원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한참을 가도 안동병원에 다다르지 않았다. 30분을 달렸다. 나는 기사에게 물었다.

“아직 병원이 멀었나요, 걸어서 20분이면 된다고 해서요.”
“혹시 옛날 안동병원 가시는 거예요?”

나는 장례식장을 간다고 말을 했고 기사는 내가 새로 지은 안동병원에 부임하는 의사로 알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장례식장으로 다시 가달라고 했다. 택시를 30분 넘게 더 타서 안동시외버스정류소 가까이 있는 안동병원 장례식장에 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권정생 선생님이 안동 시내 구경을 시켜주셨구나. 모내기가 한창 끝난 논을 보았고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 단지도 보았다. 논물이 든 곳은 선생님이 바라는 세상 같아서 마음이 푸근했는데 아파트가 하늘을 찌르는 모습은 선생님이 바라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듯해서 마음이 답답했다.

선생님은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고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꿈을 꾸셨다. ©풀무질

2007년 5월 17일 목요일, 이날 권정생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당신 나이 70살이다. 많은 사람은 이 분을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쓴 동화작가로 안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의 하느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한티재 하늘’, ‘죽을 먹어도’ ‘빌뱅이 언덕’ 같은 산문도 쓰고 시도 쓰고 소설도 펴냈다. 그리고 경북 안동 조탑 마을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 편지를 읽어 주기도 하고 편지를 대신 써 주기도 했다.

편지가 슬퍼서 마을 아지매들이 마음 아파할까 봐 조금 다르게 해서 읽어주기도 했다. 겨울 누울 수 있는 방 한 칸에 마을 아이들이 오면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날이 추워 방으로 쥐가 들어오면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잤다. 호미와 괭이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살다 갔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아는 얼굴이 여럿 있었다. 모두 마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내게 눈짓을 하거나 손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쓸쓸하게 혼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30분도 안 돼서 일어났다. 서울 가는 막차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싶지 않았다.

나는 책방 풀무질을 꾸리면서 장례식장 딱 세 군데만 갔다. 시인 김남주, 통일일꾼 문익환 그리고 권정생. 책방 가까운 서울대병원에서 이름난 사람들 장례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마음은 보내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책방 일이 많기도 하지만 그곳에 가면 괜히 세상 바꾸는 일을 한다고 얼굴을 내밀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속에 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생각은 참 잘못되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백남기 농사꾼이 돌아가셨을 때는 서울대병원에 여러 번 갔다. 그것도 백남기님 장례식장은 딱 한 번 갔고 장례식장 옆길을 서른 번 넘게 지나갔다. 내 아버지가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서다. 아버지는 지난해 가을 한가위 마지막 쉬는 날 뇌가 망가져서 식물이 되었다. 말을 못 하고 오른쪽 팔다리를 못 쓰고 사람을 못 알아본다.

오, 선생님! 하늘나라에선 선생님이 늘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지요. 어른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죽거나 눈물 흘리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에서 환한 웃음꽃을 피우고 계시는지요.

나는 죽어서 어머니 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다. 그 곁에 권정생 선생님도 같이. ©풀무질

아무튼 나는 권정생 선생님 장례식장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때야 눈물이 비 오듯이 솟구쳤다. 그때까지도 내리는 비에 섞여 내 눈물이 보이지 않아 더 마음껏 울었다. 어떻게 버스를 타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슬퍼할까. 나는 죽으면 하늘나라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오순도순 다시 살고 싶은데 그 자리에 권정생 선생님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

권정생 선생님은 며칠 뒤 내 꿈에 나타났다. 선생님은 어느 시골 개울에 들어가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선생님, 뭐 하세요.”
“응, 종복 왔나. 여기다 호미를 빠뜨렸네.”

나는 잠시 주춤하다 바지를 걷고 물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찾아드렸다. 선생님을 그것을 받고 고맙다고 하면서 멀리 걸어갔다. 그러다 다시 발길을 돌려 나에게 오셨다. 뭐 이런 말을 하셨다.

“이것은 자네가 써야 할 것 같네. 좋은 것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하게.”

나는 입버릇처럼 내 꿈은 농사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책방 풀무질이 빚덩이에 올라앉아 그 꿈을 언제 이룰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선생님이 꿈에서 주신 호미를 갖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살고 싶다. 그래야지 죽어서 선생님을 만나도 떳떳하지 싶다.


2017년 10월 22일 일요일 아침 해가 아름다운 날,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 사진 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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