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3 | 홍대 앞 잔다리길의 동네서점 여행지도 -2/2

동네3 | 홍대 앞 잔다리길의 동네서점 여행지도 -2/2
책방으로 떠나는 도시 속 착한 여행, 「여행자의 동네서점」
여행자의 시선으로 동네서점이라는 작은 점과 점을 6개의 선으로 엮어 서울의 동네서점 여행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서점은 도시 여행자의 팍팍한 삶에 휴식과 영감을 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후원금은 「여행자의 동네서점」 지도와 책자 제작에 쓰입니다.
이 6개의 선은 책·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6일간의 여행 코스로서뿐 아니라, 데이트 코스와 휴일 산책길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여행자의 동네서점」 지도와 책자를 들고 책방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잔다리길의 동네서점 여행지도 ⓒFunnyplan
1984
여기, 서점 맞나요
만화서점과 해외출판물서점을 뒤로하고 큰길을 건넜다.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200여 미터 남짓 걸으면 소란스럽지 않은 뒷골목이 나온다.
<1984>의 잔디 마당과 입구
이 뒷골목에 청량한 느낌의 잔디마당을 가진 <1984>가 있다. ‘책은 문화의 뿌리이자 그 결과이다.’라고 씌여진 큰 세움 간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1984>에 들어섰을 땐 책이 너무 적어 이곳이 서점인가 싶었다.
서점이라기보단 책이 있는 카페, 책을 파는 아트숍처럼 보였다. 책을 위한 공간은 유리창 앞에 놓인 책장과 책이 촘촘히 꽂혀있는 책 매대, 아트상품과 함께 놓인 또 다른 책 매대 하나가 전부였다.
<1984> 진열대에 놓인 책들
하지만, 책 자체로는 적은 숫자지만 책 한 종도 고심 끝에 선택한 듯 했다. 책 한 권의 배치에도 신경 쓴 보였다. 모든 책은 내용을 미리볼 수 있게 샘플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독자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운영하는 <1984>는 서점과 카페, 편집숍 그리고 전시공간이 결합한 형태다.
책과 관련된 전시와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1984>는 전혀 기능이 다른 공간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1984> 책과 함께 진열된 다양한 아트상품
비치된 책은 독립출판 잡지와 소설, 수필이 많았다. 그리고 장소적 특성상 디자인 관련 서적도 많이 눈에 띄었으며, <1984>서 출간한 책도 있었다.
<1984>는 전신인 희망사(1951년 설립), 혜원출판사(1977년)의 뒤를 이어 ‘예술가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패션북’, ‘남자의 기술’ 등을 출간하며 3세대로 거듭난 출판사이기도 하다.
음료 주문대 양옆으로 무료 배포하는 잡지와 발간물, 엽서 등이 많았다. 「Don't Panic」이 달랑 두 개밖에 없었기에 일단 재빨리 한 개를 집어 들었다. 「Don't Panic」은 영국 브리스톨에서 시작된 음악, 예술, 패션, 이벤트 등 동시대 문화를 소개하는 플라이어 팩 형태의 종합 문화잡지다. 플라이어 팩 안에는 다양한 이벤트 플라이어와 한정판 포스터, 엽서, 스티커, 룩북 등이 동봉되어 있다.
<1984>의 커피와 책
책 한잔 주세요
<1984> 중앙에는 아일랜드 스타일의 주문대가 놓여 있다. 한쪽은 카페의 결재 기능을, 다른 한쪽은 책과 아트상품을 결재하도록 나뉘어 있었다. 음료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즐기기 위해 카페 주문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주문대 위에 책 한권이 보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 아메리카노 = 10,000
책 한 권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세트로 엮은 메뉴라니.
그것도 책 한 권 가격에 커피까지. 나는 고민 없이 세트를 주문했다. 어디에 앉아야 이곳에서의 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 좌석을 두 번이나 옮겨서야 투명 유리컵에 예쁜 꽃이 꽂힌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정판이 내 자리로 서빙됐다.
제값을 치렀는데도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 세트 메뉴 아이디어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며 책을 들추었다. 잠시 허기진 책욕과 식욕을 채우고 나서야 <1984>의 구석구석에 시선을 던졌다.
‘1984가 무슨 뜻일까. 조지 오웰의 1984인가?’
이 공간 이름이 지닌 의미가 궁금해졌다. <1984>가 당연히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을 선망하여 지은 이름이라 추측했던 나였다. 포털 사이트에선 주인장의 출생연도와 밀접한 관계라는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1984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시작이 아니라, 복합 문화의 유토피아가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었던 것일까.
뮤지엄을 벗어난 전시
끝없이 반복되는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과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작은 전시공간이 내 눈길을 끌었다.
한 남자의 모노드라마 같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던 <1984> 내 스크린
스크린에서는 한 남자의 모노드라마 같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1984> 공간에 흐르는 음악이 영상 속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영상은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하얀 방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방에 들어온 남자는 담배 한 개비 한 개비에 정성스레 불을 붙이고 캔버스에 올려놓는다. 담배는 스스로 몸을 태워 옅은 불빛을 발아하고, 캔버스는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이내 영상 속 작품을 찾아냈다. 카페 벽에 나란히 그 작품이 걸려있었다.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과 함께 보니, 작품과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신모래 작가의 쇼케이스가 진행 중인 1984 전시공간
투명한 유리 벽으로 구획한 작은 전시공간에서는 ‘신모래’ 작가의 쇼케이스가 전시 형태를 빌어 진행 중이었다. 핑크빛 네온사인이 유리벽에 비추어 반사되며 서점에 들른 손님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거나 무언가를 구매한 손님들은 자연스레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모습이다. 전시는 한 남자, 한 여자의 사소한 일상을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컬러의 일러스트 그림 몇 점과 아트북, 페이퍼백, 엽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오늘도 현재 진행 중
책과 아트상품과 커피와 전시가 함께 하는 <1984>
전시와 카페가 결합되거나 음료와 책을 함께 파는 서점이 이제 흔해졌지만, <1984>처럼 나열식이 아닌 복합적인 기능들을 꽤 세련된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융합한 공간은 흔치 않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낡은 건물 사이로 고양이가 슬금슬금 걸어 나오고, 손에 가방을 든 직장인들이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책 읽기 딱 좋은 어슴푸레한 시간이다.
땡스북스 Thanksbooks
어서오세요, 땡스북스입니다
잔다리 길을 거슬러 올라 오늘의 마지막 서점을 찾았다.
책방 좀 다녀봤다 하는 사람은 한 번쯤 가봤을 <땡스북스>다.
<땡스북스>는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 상상마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땡스북스>의 상징인 노란 간판이 또렷이 보였다.
유리창 밖에서 바라 본 <땡스북스>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수많은 책과 따뜻한 노란 불빛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유리창 밖에서 본다면 서점인지 커피집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서점에 들어서면 주인장의 고심 끝에 선택된 수많은 책을 만날 수 있는, 분명 서점이다.
<땡스북스>는 다른 동네서점보다 조금 규모가 큰 편이다.
규모만큼이나 서점 내에 책 진열 공간도 다채롭고,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도 놓여있다. 그리고, 간단한 음료도 즐길 수 있다. 벽면 붙박이 책장과 아일랜드형 진열대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분야별로 책을 둘러보기 쉽게 서점 공간이 구성되어 있었다. 책장과 진열대, 진열장은 각각 콘셉트와 주제에 따라 책과 소품, 디자인 제품이 놓여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벽면 붙박이 책장과 진열대가 촘촘히 배치된 <땡스북스> 서가
나는 유리창 밖으로 길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보이는 창가에 멈춰 섰다.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 몸을 천천히 돌리며 서점을 둘러보았다. 예닐곱 명이 제각기 자신의 자세로 자신의 책을 들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노란 조명이 그들의 세계를 지켜주듯 감싸 안고 있었다.
취향 저격의 북 큐레이션 책방 동네서점
<땡스북스>는 브랜딩, 소설/에세이, 미술/회화, 그래픽디자인, 잡지 등 각 분야에 따라 주목할 만한 책과 신뢰할 수 있는 출판사의 엄선된 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 구성을 들여다보다 매우 흥미로운 생각을 해본다.
‘디자인’을 시작으로 연결된 듯한 일정한 성향의 책 구성이 눈에 띄었는데, 이었다. 책 읽기에 ‘맥락적 읽기’라는 게 있는데 꼭 독자들의 책 읽기까지 염두에 둔 구성처럼 보였다.
홍대 앞이라는 특수한 장소 특성을 고려한 주인장의 전략적 구성일까. 아니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도 한 주인장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까.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 《속눈썹의 효능》, 이은규
<땡스북스>에서 진행중인 '문학동네시인선'의 이벤트
최근 시집이 인기가 있어서인지 시집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통과의례처럼 모든 사람이 한 번씩 '문학동네시인선'의 시집을 들추고 지나갔다. 시집 속에서 걸어 나와 낙엽처럼 놓여있는 시구절에 눈길이 갔다.
이 책 저 책 바삐 오가며 시집을 들추다가, 얼마 전 케이블방송에서 소개되어 관심받았던 박준 시인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유리창 밖이 완벽히 어둑해져 있었다.
책 테이블 너머로 보이는 캔버스와 시집
벽에 색색의 표지와 정갈한 글귀가 액자처럼 걸려있는 시집들이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한 권 한 권의 책으로서가 아니라, 스물여섯 권이 하나의 그림으로 벽면은 캔버스로 보였다. 그리고 그 캔버스 위에 봄이 애처롭게 머물러 있었다. 이문재 시인이 선물한 봄이었다.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봄 편지》, 이문재-
책방 속 갤러리
<땡스북스> 안에는 계단이 숨어있다.
서점 가장 안쪽에서 숨은 계단을 발견할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더 갤러리’이다. 서점을 거치지 않고 건물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도 있지만, 서점을 둘러보고 서점 안에 숨어있는 좁은 계단을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이 곳은 2011년부터 매년 열 개 이상의 기획 전시를 선보이고 있는 전시공간으로, 전시 외에도 작가와의 만남, 출판사와 협업 세미나, 이벤트 등이 열리고 있다.
더 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계단 아래 <땡스북스>
나는 서점을 욕심껏 둘러보고 난 후,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예쁜 엽서와 책갈피가 내 발길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림책에 실린 원화로 만들어진 엽서와 책갈피였다.
갤러리는 생각보다 넓고 정갈했다.
반듯한 직사각형의 공간에 하얀 벽과 노란 조명이 조화를 이루어 소규모 갤러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흥미로운 책 소개가 담긴 <땡스북스>의 메모들
안녕히 가세요, <땡스북스>입니다
<땡스북스>의 영업 종료시각은 오후 9시 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점을 둘러보며 마음에 담아 둔 책 중 무엇을 사야 할지. 책 진열장과 진열대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결국 아까 읽다 만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골랐다.
오늘은 평소 잘 사지 않는 시집을 두 권이나 산 특별한 날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또 놀러 오세요!
노란불빛과 어울리는 <땡스북스>의 노란 테이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며 잔다리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는 <땡스북스>.
앞으로도 오래 이 자리에서 변함없이 그들의 철학을 이어가길 기대해본다.
글/사진 구선아 · 일러스트 이예연
기획/제작 퍼니플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