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평 서점에서 꽃 핀 사랑... 책방 풀무질과 나 #4

4.5평 서점에서 꽃 핀 사랑... 책방 풀무질과 나 #4
작은 책방 지키기 25년! 도서출판 '한티재'가 동네서점 포스트에 1년간 연재해 온 성균관대학교 앞 ‘책방 풀무질’ 책방지기 은종복의 오래되고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동네서점브릿지
“‘정태춘 박은옥 92 장마 종로에서’ 테이프 20개 보내 주세요.”
책방 풀무질을 하면서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가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아내는 거래처에서 일하고 있었다.이 날 한 통의 전화로 우리의 첫 만남이 시작됐다.
4형제와 어머니. 맨 오른쪽이 나다. 나는 집안일도 좋아해서 딸 노릇을 했다 © 책방 풀무질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대안 학교에 다닌 일이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데모를 하고 술을 마시고 글을 쓰느라 연애를 못 했다. 연애를 하고 싶어도 1980년대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같은 모임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사귀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더구나 세상을 바꾸는 모임에 들면 혁명과 사랑 가운데 하날 선택해야 한다.
나야 뭐 목숨 내놓고 학생운동 하진 않았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 폭압 학살 정권에 맞서 싸우려면 연애를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대학 4학년 때 잠시 마음을 준 여자가 있긴 했지만 연애라고 말할 수 없는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학 다닐 때 데모만 하고 다닌 애가... 무슨 책방을 하겠니?"
어머니 도움으로 책방 풀무질을 열었다.
1993년 4월 1일의 일이다. 내가 책방을 하겠다고 하니 아버지를 비롯해 위로 형 둘 아래로 동생 하나까지 식구가 모두 반대했다.
욕만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만이 찬성을 했다. 어머니가 우리 집 경제권을 갖고 있어서 집만 팔지 않았지 모든 돈을 끌어 모아 7천만 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책방 풀무질을 꾸리도록 도와주셨다.
처음 책방 풀무질 자리. 4.5평밖에 안 되었다. © 책방 풀무질
책방을 열고 한 해쯤 지났을까.
나는 한 달에 두 번 가까이 맞선을 봤다. 어머니가 아는 친구의 딸 들이다. 나는 혼례를 치르겠다는 생각보다 어머니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다. 내가 29살이니 딱 결혼 적령기였다. 나는 위로 형 둘,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는 남자만 있는 집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여자들과 더 잘 어울렸다.
내 몸에는 여성성이 많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여자처럼 키우셨다. 같이 실타래를 풀어서 뭉치 실을 만들기도 하고 감자 껍질도 내가 깎았다. 설거지도 내가 하고 집 안 청소도 즐겨 했다. 집 앞 텃밭에 키운 애호박 따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내 몸은 축구, 야구 좋아하는 근육을 가졌다. 하지만 마음은 집안일 하는 것에 익숙했다.
아무튼,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열 번도 넘게 선을 봤다. 나는 여자를 만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편했다.
그때 만난 여자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혼례를 치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지금이야 한국 떠나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아져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다. 1994년에 내가 만난 여자들도 그랬다. 그 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반도 남녘이 살기 힘들면 그것을 고치려 하고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세상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하나같이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 옷 예쁘게 차려입은 것은 좋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것도 좋다. 하지만 겉모습이 예쁘면 마음도 예쁘면 좋겠는데 몇 마디 말을 나누면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내가 남자들 속에서만 살고 데모하느라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으며 고리타분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여자들을 두 번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해 말 만난 여자는 달랐다.
짧은 곱슬머리에 작은 눈 작은 입을 가진 조용한 여자였다. 나를 대학 다닐 때 봤다고 했다. 1987년 서울지역 문학협의회 처음 만들 때 봤다고. 그 여자와는 석 달 가까이 만났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꾸리는 책방 풀무질에 딱 한 번 오더니 다음에는 만나 주지 않았다. 약간 속이 아팠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나랑 혼례를 치르고 콩알 만 한 책방에서 평생 살 생각하니 싫다고 했단다. 뭐 내가 책방 일을 같이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그때는 내가 지금처럼 오래도록 책방을 할지도 몰랐다. 1994년 책방 풀무질은 작긴 작았다. 4.5평짜리 공간이 1층, 2층으로 있을 뿐이니 다섯 명만 들어오면 책방이 꽉 찼다.
그렇게 어머니 소개로 만난 여자들은 모두 나를 떠났다. 그때 지금 나랑 사는 아내를 알게 됐다. 아내는 내 거래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울매체'라고 민중가요 테이프 파는 곳이었다.
“민중 해방의 선봉, 성대 앞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에요. ‘정태춘 박은옥 92 장마 종로에서’ 테이프 20개 보내 주세요.”
아내는 목소리가 참 고왔다.
대학 다닐 때 방송국에서 일을 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테이프로 음악을 많이 들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민중가요를 부르고 들으면서 뜻을 바로 세우고 서로 힘을 북돋았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나는 아침에 '서울매체'로 테이프를 주문했다.
1980년대에는 민중가요 부르고 들으며 서로 힘을 키웠다. © 책방 풀무질
나는 테이프 주문할 때 이렇게 재미나게 말했다. 그때마다 아내도 살짝 웃어 주었다. 이 주문을 한 날은 늦게 주문해서 그날 바로 받을 수 없었다. 책방에 이 테이프를 주문한 사람이 멀리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땐 손전화기가 없어서 그 사람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녀는 오늘 대학로에 나올 일이 있으니 직접 갖다 주겠다고 했다.
저녁 5시쯤 테이프를 들고 왔다. 그 시간은 성균관대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책을 사갈 때라 책방에 손님이 많았다. 나는 따뜻한 차를 한 잔 주려고 했지만, 그럴 짬도 없고 서 있을 자리도 없었다. 테이프만 주고 나가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나는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후딱 정리하고 책방 밖으로 뛰쳐 나갔다. 뚱뚱한 몸차림에 조금 실망했다. 나는 목소리가 고와서 몸매도 작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땐 남자건 여자건 뚱뚱한 사람에겐 정이 덜 갔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날 두터운 코트를 입어서 뚱뚱해 보였던 거다.
종종 그렇게 그녀는 테이프도 갖다 주고 그곳에서 나온 책도 갖다 주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언제 한 번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다음 해 여름 그녀와 내가 같은 마음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전혀 뚱뚱하지 않았고, 선 봤던 여자들과 달리 말이 잘 통했다.
20세기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 20C)
“오늘 영화 재밌었으면, 영화 같이 더 볼래요?”
부모님 도움으로 처음 책방 풀무질을 열었다. 아들 두 돌 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책방 풀무질
우리는 그렇게 가끔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며 가까워졌다. 이렇게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를 했다. 그리고, 1996년 1월 27일에 혼례를 치렀다. 책방 풀무질을 꾸린지 3년 만이다.
2017년 4월 3일 월요일
4.3항쟁 69주기를 마음 아파하며,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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